6. 제 2회의 교세와 사회 여론

원기 25년(1940·()()) 4월은 창립 제 1대 제 2회의 결산 총회기에 해당하였으나, 시국 관계로 기념 행사는 일체 갖지 못하고 정례 총회에 지방 회원의 교리 강연회를 처음 겸행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당년도 말 사업 보고에 의하면 교도 수는 특별 회원 871명, 통상 회원 5,083명, 합계 5,954명이었고, 전무출신은 80여명이었으며, 교당 수는 제 1회(원기13년3월) 이전에 설립된 영산·익산·서울·신흥과, 원기 14년(1929·()())에 마령, 15년에 좌포·원평, 16년에 하단, 19년에 남부민, 20년(1935·()())에 전주·대판(()() ()()), 21년에 관촌·초량, 22년에 대마·신하·용신·개성, 23년에 남원·이리, 24년에 운봉·화해 등 교당이 차례로 설립되어 도합 21개소가 되었고, 당년(원기25·1940)에 대덕·호곡 등 교당이 신설되었다.

그 중 특히 일본 대판에 교당이 설립되어 초대 교무 박 대완이 부임한 일은 새 회상 해외 포교의 효시이며, 원기 22년(1937·()())에 신 영기(()()())는 총부 사무실을 희사하고, 25년(194()())에 몇 몇 특지가(별록20)는 총부 도서실을 마련, 총부의 면모를 향상시켰다.

한 편, 새 회상 공개 이후, 일반 사회의 여론은 한결 같이 우호적이고 고무적이었다. 그 중 중요한 몇 가지를 들면, 원기 13년(192()()) 11월 25일자 동아일보가 「세상 풍진 벗어나서 담호반(()()())의 이상적 생활, 정신 수양·사리 연구·작업 취사의 강령하에 움직이는 4백 회원, 익산 불법연구회의 특별한 시설」이라는 제목으로 새 회상 탐방 기사를 낸 후, 19년(1934·()()) 5월 28일자 일본의 대판 조일신문이 「불교의 진리에 입각, 근검 역행을 실천, 동지 5백이 공동 생활을 하는 반도의 새 마을」이라는 제목으로 새 회상을 소개하였다. 20년(1935·()()) 7월에 조선 총독부가 발간한 조사자료 제 42집에는 「본회는 대체로 미신을 타파하고 자연의 원리에 바탕하여, 민중의 근면을 장려한 바 있어 종교적 진흥회로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평하고, 그 자료 「전선 교별 영향표」에는 「계몽상 좋은 영향 있다. 근로 정신을 양성하고, 일면, 실지 작업으로써 일반에게 범(())을 보인다」고 되어 있다.

원기 21년(1936·()())에는 민족 지도자 안 도산(()()()()())이 총부에 내방하여 찬양과 격려(대종경실시품45)를 아끼지 않았고, 22년(1937·()())에 조광 6월호가 인식 부족한 비방 기사를 실었다가 다음 호에 찬양 기사를 낸 후, 그 달부터 매일신보·조선일보·중앙일보와, 26년(1941·()())에 경성일보 등이 각각 수일 간에 연재 기사로 새 회상의 심전 계발 운동·종교 혁신 운동·문자 보급 운동·종교 생활화 운동을 대대적으로 찬양 보도하여, 창립기 새회상의 발전을 알뜰히 격려하고 그 참 면목을 일반 사회에 널리 인식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