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념은 모든 일을 진행하는데 원동력이 되나니 유념이 아니고는 모든 일에 향상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유념의 공부는 어떻게 하는가?
이는 곧 일용 행사(日用行事)에 그 마음 대중을 놓지 않는 것이니, 이른바 보는 데에도 생각 있게 보고, 듣는 데에도 생각 있게 듣고, 말하는 데에도 생각 있게 말하고, 동할 때에도 생각 있게 동하고, 정 할 때에도 생각 있게 정하여, 비록 찰나간이라도 방심을 경계하고 정념을 수지(守持)하자는 공부이다.
그러므로, 우리 대종사께서 상시 훈련법을 정하사 공부인의 정도를 따라서 혹은 태조사(太調査)를 하게 하시고, 혹은 유무념을 대조하게 하시고, 혹은 일기를 조사하게 하시니, 이것이 비록 명목은 다를지나 통이언지(統而言之)하면 모두 이 유념 하나를 공부하게 하신 것이며, 불시(不 )라, 재래 불성의 말씀에도 구방심(求放心)이라든지 존심양성(存心養性)이라든지 성성불매(醒醒不昧)라든지 하는 등 교훈이 또한 이 유념 하나를 공부하게 하신 데 불외(不外)한 것이다. 유념 공부가 우리 인류에 반드시 떠나지 못할 관계가 있는 것은 전성 후성(前聖後聖)이 이미 증명하셨거니와 다시 몇 가지 실례로써 그 공덕을 해석해 본다면, 사람이 어떠한 사업에 성공을 하자면 먼저 그 마음을 오로지 그 일에 집주(集注)하고 그 생각이 그 일을 연마하는데 있어야 하나니 모사(某事)를 물론하고 그 일에 마음이 없고 보면 성공이 없는 것이다.
또는, 어떠한 사업을 물론하고 성공은 하였다 할지라도 영원히 그 사업을 유지하기로 하면 모든 것을 무심히 하지 말고 유의(有意)하게 마음을 오로지 그 일에 집주하여 연마가 있어야 되나니, 만일 그러한 연마가 없다면 비록 성공한 일이라도 도리어 실패가 되는 것이다. 또는, 모든 경계를 당하여 넉넉하고 급함이 골라 맞아서 군색과 실패가 없는 것은 미리 연마하는 생각이 있는 연고이니, 만일 그러한 생각이 없다면 십에 팔구는 항상 임시적 실패가 되는 것이다.
또는, 모든 일을 응용함에 시비를 잘 분석하여 매사에 중도를 행하는 것도 항상 취사하는 생각이 있는 연고이니, 만일 그러한 생각이 없다면 일용 행사가 모두 죄고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또는, 모든 일을 지낸 후에 장래의 보감(寶鑑)을 얻는 것은 항상 반성하는 생각이 있는 연고니, 만일 그러한 생각이 없다면 비록 천만 경계를 지낼지라도 그 전도는 항상 암담한 것이다. 또는, 공간시(空間時)에 처하여 망상 혼침에 빠지지 않는 것도 항상 그 망상을 제거하는 한 생각이 있는 연고니, 만일 그러한 생각이 없다면 일분 일각도 능히 정념을 보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는, 무슨 직무를 담당하여 그것을 잘 이행하는 것도 항상 책임에 대한 관념이 깊은 연고니, 만일 그러한 생각이 없다면 일의 실패는 물론이요 따라서 사회의 신임이 떨어져서 필경은 세상에 붙일 곳이 없게 되는 것이다.
또는, 모든 은혜를 입은 후 반드시 그 은혜를 갚는 것도 먼저 피은(被恩)에 대한 생각이 깊은 연고니, 만일 그러한 생각이 없다면 모든 처사가 자연중 배은(背恩) 행동이 될 것이요, 따라서 원래에 입어 오던 은혜가 도리어 죄벌로 화하는 것이다. 또는, 무슨 서약을 이룬 후에 반드시 그 서약을 실행하는 것도 항상 신의를 존중히 하는 생각이 있는 연고이니, 만일 그러한 생각이 없다면 일체 교제에 불신을 자행하여 필경은 세상의 배척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상에 말한 바는 그 유념 공덕의 부분을 밝힌 것이니, 만약 전체를 들어 말한다면 세상 만사에 어느 것이 유념 아니고는 되는 것이 있을 것인가.
과연 크도다, 유념의 공덕됨이여. 그러나, 우리가 한갓 유념의 공덕이 큰 줄만 알고 또한 무념의 공덕이 큰 줄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유념 공부에 능할지라도 도덕의 진경은 사실 더위잡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념의 공부는 또한 어떻게 하는가? 이는 곧 일용 행사에 오직 염착(染着)의 생각을 없게 하는 것이니, 이른바 보는 데에도 착이 없이 보고, 듣는 데에도 착이 없이 듣고, 말할 때에도 착이 없이 말하고, 동할 때에도 착이 없이 동하고, 정할 때에도 착이 없이 정하여, 항상 그 망상을 멸도하고 진여를 자득(自得)하게 하는 공부이다. 그러므로, 우리 대종사께서 공부의 진실처(眞實處)를 말씀하실 때에는 필경 이 무념으로써 최상 법문(最上法門)을 삼으시고 재래 불성께서도 도덕의 본지를 해석하는 때에는 천만 법어가 다 이 무념으로써 표준하셨으니, 예를 들면, 대도(大道)는 무위이화(無爲而化)라든지 상덕(上德)은 부덕(不德)이라든지 상천지재(上天之載)는 무성무후(無聲無嗅)라든지 하는 등 말씀이 모두 이 무념 하나를 잘 공부하라는 교훈이 아닌가. 그런즉, 이 무념 공부가 우리 인류에 더할 수 없는 중대 가치가 있는 것은 전성(前聖), 후성(後聖)이 다 이미 증명하셨거니와 다시 몇 가지 실례로써 그 공덕을 해석해 본다면, 사람이 도덕을 공부하여 능히 불성(佛聖)의 지위를 얻는 것은 그 마음에 내가 불성의 위를 얻었거니 하는 생각이 없는 연고니, 만일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이는 참다운 불성이 아닌 것이다. 또는, 공중에 헌신하여 영원한 공익자(公益者)가 되는 것도 그 마음에 내가 공익을 하였거니 하는 생각이 없는 연고니, 만일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이는 영원한 공익자가 되지 못하고 따라서 적세(積歲)의 공덕이 혹 일조(一朝)에 허사가 되는 수도 있는 것이다. 또는, 세상에 처하여 영원한 안락을 받는 것도 그 마음에 이것이 낙(世上樂을 이름)이거니 하는 생각이 없는 연고니, 만일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이는 낙으로부터 도리어 고(苦)를 얻게 되는 것이다.
또는 누구에게 은혜를 베푼 후 그 은혜를 영원히 보전하는 것도 그 마음에 내가 은혜를 베풀었거니 하는 생각이 없는 연고니,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이는 영원한 은인(恩人)이 되지 못하고, 따라서 은혜로써 도리어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이다.
또는, 어떠한 권위를 얻어서 영원히 그 권위를 유지하는 것도 그 마음에 내가 권위를 가졌거니 하는 생각이 없는 연고니, 만일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자연중 남권(濫權)의 일을 행할 것이니, 따라서 얻은 바 그 권위가 도리어 타락이 되는 것이다.
또는, 어떠한 처사에 당하여 항상 공정을 잘 가지는 것도 그 마음에 오직 편착의 생각이 없는 연고이니 만일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모든 일이 사사(私邪)에 돌아가서 영원히 공중의 죄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는, 동정간에 처하여 항상 정신의 안정을 얻는 것도 그 마음에 오직 애욕의 생각이 없는 연고니, 만일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천만 외경(外境)이 심신을 유인(誘引)하여 영원히 무량 고해에 들게 하는 것이다.
또는, 사람이 대도를 증득하여 법진(法塵)에 끌리지 않는 것도 그 마음에 또한 무념을 하였거니 하는 생각이 없는 연고니, 만일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천만 가지의 번뇌 망상이 계속 병기(竝起)하여 이른바 일파재동만파수(一波 動萬波隨)의 격이 되는 것이다.
이상에 말한 바는 그 무념 공덕의 부분을 밝힌 것이니, 만일 전체를 들어 말한다면 우주 만유의 대도 대덕이 모두 이 무념으로써 구성된 것이다. 과연 크도다. 무념의 공덕됨이여, 그 공덕을 어찌 언어와 문자로써 다 형용할 수 있으랴. 수도하는 동지여, 유념 가운데 무념의 공부가 있고 무념 가운데 유념의 공부가 있음을 잘 해득하여 유념할 곳에는 반드시 유념을 잃지 말고 무념할 곳에는 반드시 무념을 잃지 말아서 유무념의 참된 공덕을 개개히 다 수용하여야 할 것이나, 만일 이 공부의 길을 알지 못한 사람은 유념할 곳에는 반드시 무념을 주장하고 무념할 곳에는 반드시 유념을 주장하여 유념과 무념이 한 가지 죄업을 지으며 무궁한 저 고해에 길이 침몰하는 자가 많을지니, 어찌 한심하지 아니하랴. 공부인은 모름지기 여기에 잘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시창 23년 <회보> 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