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한 서원 한 마음으로 와도 그 일이요 가도 그 일인지라 대종사님께서 새 주세불님으로 새 회상 펴시려 이 땅에 오심에 또한 약속 따라 법사께서도 회상 초창에 오시어 대종사님과 정산종법사님을 모시고 42개 성상을 맡으시는 일마다 성공을 거두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일들이 커지고 발전하므로 항상 덕의 꽃이 피어 어느 기관 어느 교당이 보화당의 협조를 입지 아니한 바가 없습니다.
법사께서는 6.25의 국난을 전후하여 교단의 외교를 맡아 활동하면서 교단의 어려움을 잘도 풀어 주었고, 난세인 그때에 교단 인재 보호에 혈심을 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인재들이 다 무사히 난을 넘기고 자라게 됨으로써 그 분들이 오늘날이 교단에 없어서는 안될 중견 간부들이 되어 큰 일들을 하고 있으니 그 숨은 공덕이 크며 대종사님과 정산종법사님께 큰 보은을 하였습니다. 또한 일생을 산업의 전선에 서서 상(商)의 도를 구현시켜 공부로 사업하고, 사업으로 공부하는 표본을 세우는데 힘이 되시었습니다. 또한 총부 유지와 그 재단의 생불불사(生佛佛事)에 수십년 전담하였으며, 육영생 육성과 교화 재단이며 근래에는 훈련원에 필생 사업으로 큰 힘을 다하시어 교단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니, 앞으로 천(千)의 만(萬)의 덕산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업적 교단사에 길이 빛나고 후학들이 흠모하며 받드는 바가 될 것입니다. 이에 한 게송으로 영생을 비옵나니
오면 정녕 가는 것
가면 정녕 오는 것
주면 반드시 받는 것
받으면 반드시 주는 것이니
이 대도(大道) 사이에 세세생생 큰 서원 세우시고 오고 가는데 자유로운 큰 도력을 오는 생에는 더욱 많이 쌓으소서.
<원기63년 1월4일>
덕산법사 영전
본래 이 어른의 서원이 크셨고 호 그대로 덕산이셨다. 어려운 보화당의 사업 기관에서 공사간에 애로 있는 일이 많이 있는 줄 알지만 짜증냈다고 들은 바가 없다. 보통 원력과 덕이 아니면 안된다. 조그마한 기관 하나만 갖더라도 어려운 일이 많이 있을 텐데 평생을 덕으로 일관하셨다. 8.15 해방과 6.25를 지내며 우리가 늘 같이 동고동락 하였다. 총부 형편이 저녁을 굶고 살 그런 어려운 시기에 재무부장을 맡았는데 내가 교정원장으로 있을 때에 「이런 일이 있는데 어쩌면 쓰겠습니까」 하면 경제라는 것은 머리를 앓는 것이 되어서 짜증을 낼 법하지마는 「아, 해봅시다」 하였다. 열이면 열번, 백이면 백번 해보자고 하지 반대해 본 일은 없다. 그래서 열에 다섯, 여섯 성공된 일도 있고 못되는 일이 있었어도 면전에다 [이것 못씁니다] 이런 말하신 적이 없다. 그래서 항시 그 일이 원성(圓成)이 되고 커 나갔다. 그런 걸 볼 때, 이 어른이 이생에 수양 뿐 아니라 전생에도 덕을 많이 쌓은 어른이다. 그러니 교단 생활을 하다가 어려운 일을 맡을 때에 의논하고 연구하고 앞으로 또 생각해 보자 하여 서로 정이 건너야 한다. 청년들이 6.25 당해서 숨쉴 틈이 없을 때 선종법사님이 「덕산, 이런 일이 있다니 어쩔라는가」하니 「아, 가보죠」 하고 두루마기 입고 갔다. 그 이튿날도 「그런 일이 있다는데 어쩔란가」하니 「예, 가보죠」 하고 가지 「안됩니다. 못 갑니다」 그런 말이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풀린 일이 수십 가지가 되었다.
대종사님께서 「도산 같이 공부에도 교화에도 소질이 있는데 사업계에 맡겨서 일생을 마치게 한 것이 마음이 아프다」 하셨다. 십년 전인가 신도안에서 한달 머물 때에 글도 짓고 글씨도 썼는데 소질이 있었다. 「이러니 모두 수도를 할라는가 봅니다」 하면서, 글도 짓고 쓴 것이 있어 보니 소질이 있는 분이셨다.
이 초창에 그런 곳에서 어려운 생활을 했으니 이 회상이 되었지 그냥 되었겠느냐?
이 어른이 재무부장으로 있을 때 어려운 생활로 고생이 심하였다. 이때 「우리 부산 일대로 한번 쉬러 가십시다」고 하여, 상산법사와 함께 마산으로 한 20일 계획으로 쉬러 떠났다. 3일 정도 지나니 덕산법사가 「나는 쉬들 못하겠소, 못살겠소. 내가 가서 활발히 일도 거들고 무엇인가 해주어야 하는데 일을 않고 가만히 앉았으니 병이 날 것 같소」 하고 하소연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조금 더 있어 봅시다」 하니, 나중 한 일주일 지내더니 드러누워 버리셨다. 나는 쉬러 다닌 줄 알았는데 이 분은 고통이 되었던 모양이더라.
그래서 주소일념(晝宵一念) 계속해서 보화당에 계신지가 몇 해 됐냐? 이 근자에는 못했지만 그 전에는 내가 지방에 갔다 오면 꼭 보화당에서 잤다. 지금은 어떠 하는지 몰라도 여름에 거기서 자면 숨이 막힌다. 무더운 한 여름뿐만 아니라 겨울에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 양반들은 일년 뿐 아니라 일생을 그런 고생을 한다」 생각하며 하룻밤씩 자고 오면서 보면 이 분은 그때나 그 다음이나 꼭 한 마음이셨다.
이 보화당으로 인해서 7군데 보화당이 생겼다. 이 분 밑에서 예산이 일을 하였다. 그리고 예산이 훈련하여 양성한 인재가 지금은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 이 양반은 인재로 인해서 고통하고 걱정해 본 일이 없었다.
여섯 군데를 살림을 분가하여도 「해봅시다」 하지 당신이 먼저 그 사람 못 데려 간다는 일없었다. 그렇게 못하는 일이다. 덕산법사에게 말해서 지방 창립하는데 몇 만원씩 걷어라 하여, 가서 부탁하면 다만 얼마씩이라도 주지 딱 떼어버린 일이 없다. 자식 형제가 많은 부모는 다 그런다. 살짝이 이놈 모르게 주고 저놈 모르게 이놈 주고 해서 다 살려낸다. 그것이 이 어른의 표본이시다. 끊질 않으신다. 우리 뿐 아니라 지역주민들도 어려운 일 있으면 이 분한테 가서 부탁했다. 대종사님께서 이름에 전생 표현이 나타난 것이라 하셨는데 덕산 이름 그대로 잘 사셨다. 그 성격 쓰시는 것이 참으로 덕스러우셨다. 「양산, 자네는 솔직하니 잘 말하지」 양산법사도 남 쏘아 대는 일 못 보았다. 총무부장 할 때 말이다. 예, 하다가도 자울러 버리지, 그리고는 사방에서 찔러 대면 「아, 나 못 들었네」 하지 탁탁 끊고 찍는 일없었다. 그러니 간부들은 이 회상이 내 가정이고 누구를 믿고 살겠는가? 다 우리를 믿고 와서 사니 힘 닿는 대로 다 챙겨 주고 싸 주고 저쪽에서 잘못할 때에 내가 용서해 주고 감싸주어야 한다. 내가 용서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야 한다. 공부할 때를 당했다 해서 싸 주고 용서하면 그것이 덕이 된다. 저쪽 잘못했을 때 좋은 기회가 왔다, 때는 이때다 하여 사방으로 탁 눌러 버리는 것은 범상한 사람들의 짓이다.
덕산법사가 덕스럽게 지낸 일이 교단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표본이 될 것이다. 앞으로 내생에는 내가 게송한 바와 같이 가면 정녕 오는 것, 오면 정녕 가는 것, 주면 반드시 받는 것, 받으면 반드시 주는 것, 이것이 진리임을 알아 복을 많이 짓고 덕도 쌓은 분이다. 막힘 없이 공부 사업 잘 하실 것이다. <원기63년 1월4일>